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면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물 속에 진주를 빠뜨렸답니다.
이 사람,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큰 바가지로 바닷물을 떠서 버리기 시작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사흘 밤낮을 끈기 있게 물을 퍼내고 있을 때 물 속에서 거북이가 나와서 물었답니다.
"아니, 도대체 뭘 하려고 물을 그렇게 퍼내고 있소?"
"바닷속에 빠뜨린 진주를 찾기 위해 물을 퍼내고 있네”
"그런데 그 일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그야 물론 이 바닷물을 다 퍼낼 때 까지 할 작정이오!“
이 말을 들은 거북이는 깜짝 놀라 물속으로 급히 들어가 진주를 찾아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다는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 같았던 행동이 뜻하지 않게 거북이를 자극해 이루어 진 셈인데요.
우린 간혹 터무니없이, 그것도 오랜 시간 남들이 무모하다고 생각하리만큼 긴 세월을 마치 물속에 빠진 진주를 건져내기라도 하듯이 기도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마치 “도대체 이 기도는 언제쯤 이루어질까?”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픈 마음마저 들 때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신 소망을 굳게 잡고 인내하며 기도한다면?
앞서 재미난 얘기에서처럼 바닷 속에 빠뜨린 진주를 거북이가 찾아 주듯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거라는 사실... 절대로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고난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지금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비록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때론 납득되지 않는다 해도
지금의 시간이 지나고 그리고 나중에 가 보면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은 그저 극복해야 할 장애물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시련과 고난을 통과하고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그 시간이 주님의 뜻 안에서
내게 필요없는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을 채워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긴 터널을 지난다 해도 그 끝은 반드시 있으며
주님의 손안에 놓인 인생은 결코 낭비되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무익하지도 쓸모없는 삶이라고 해석해서도 안됩니다.
그 꿈과 순종의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는 한 그 고난과 기다림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우리 영혼이 건강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뿌리 깊은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영혼이 죽어 있다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간은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해도 내면은 이미 죽어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께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삶의 근거요 기준이요 표준이며 목표가 되신 예수님께 뿌리를 내릴 때만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영적 송유관
오래 전 외국의 컴퓨터 해커들이 미국의 송유관을 장악하여 유류운송 대란이 벌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순간 완전히 통제권을 상실한 정유회사는 꼼짝없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확보된 기름도 그 흐름을 막아놓으니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기도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기도를 놓치면 안 됩니다.
기도를 놓치면, 그동안 그토록 믿어왔던 신앙은 물론이요,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해도 끝까지 기도를 붙잡고 있으면 반드시 이겨냅니다.
기도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극한의 상황을 이겨낼 힘을 공급해 주는 영적 송유관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사안에 따라 되고 안 되는 것이 아닌 100%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100%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집니다.
요즘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정말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마틴루터가 당시 절대권력인 캐톨릭을 향해 95개 조항에 걸친 반박문을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목숨을 걸고 게시한 이후, 지금까지 복음의 진정성과 교회의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인가!'에 대한 질문을 교회는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50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린 또 다시 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하나님 앞에 진실된 모습인가?'
'무엇이 가장 하나님께 온전한 모습인가?'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결코 우리의 경험과 생각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미 504년 전에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바른 신앙, 내가 바라는 바른 신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 기준이 오직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든 질문과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 그들이 그토록 목놓아 외첬던 선포(개혁주의 신앙노선)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미 500여년 전에 외쳤던 그 외침을 우리가 다시금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그들이 목숨걸고 기득권과 잘못된 신앙노선과 싸웠던 그 기준을 따르기 원하십니다.
바로 그들은 그렇게 한 세대를 살고 안개처럼 사라졌지만, 그 기준과 외침은 영원히 남아있어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함께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