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으라
하나님의 선언된 말씀은 우리 인생의 좌우명이나 교훈, 이론, 사상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선포되는 그 말씀이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그저 [일반서점]에서 판매하는 여타의 자기수양 도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받아들일 때 그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자면,
1)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이나 논리가 아닌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준이 되며
2) 하나님의 그 말씀은 사람의 영과 혼과 육신을 터치 하고,
3) 무엇보다 삶의 모든 내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사모하나 은혜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삶의 공통점은 선포되는 그 말씀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판단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결국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자기 자신의 자아가 강할수록 그 말씀이 그 사람의 삶에 착상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간혹 말씀 앞에 순수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자아가 강하고, 자기고집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강력한 자아] 혹은 [고집]이라고 표현하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바로 [어두움], [미련함], [사로잡힘]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기준... 그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흐트러짐 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견고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의 마음
29살에 나는 14시간을 기다려서 ‘출산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가 산고를 겪고 있을 때, 난 문 밖에서 무려 14시간을 기다려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
37살에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니면서 우등상장을 처음 타왔을 때, 그 상장을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난 그렇게 행복했다.
45살이 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을 때,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53살에 딸이 첫 월급을 타서 따뜻한 내복을 사왔다.
쓸데없는데 돈을 썼다고 나무랬지만 밤늦은 시간에 혼자 그 내복을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정말로 행복했다.
63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멀찍이 서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 어느 아버지의 일기-
완성도 있는 기도가 되려면
사람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려는 그런 거룩한 의도가 진정 중심에 깔려 있을 때 그 기도는 엄청난 능력과 파괴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왕상3:5]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말하라.”
그때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 지혜는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역사는 삶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때 우리에겐 [준비된 답변]이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명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로 다스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가치와 나라에 초첨(포커스)을 맞추었더니 그것이 모든 것에 경쟁력이 된 것입니다.
<기도의 완성도>는 바로 이 사랑과 섬김에 의해 좌우되고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목적을 갖고 기도하고 열정을 다해 기도해도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섬김이 없이 하는 기도는 결코 [완성도 있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파괴력 있고, 완성도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내 삶 전체에 구체적인 섬김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사랑과 섬김의 의도가 분명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않은 검증된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완성도 있는 기도가 되려면2
우리가 살아가면서 섬겨야 하는 일.
내 시간, 내 물질, 내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할 그곳에 쏟아 붓지 않고 하는 기도는 대부분 이기적인 내 요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생과 섬김이 없는 기도는 완성도도 없고, 영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에서 오랜 시간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섬김이 가득 찬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 기도는 내용을 들으면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것입니다.
바로, 섬김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구하세요. 건강을 구하세요.
돈과 지식과 권세와 명예와 지위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믿음의 가문을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럴 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Why] “내가 왜 그것을 네게 줘야 하지?”
그 하나님의 물으심 앞에 떳떳이 더 큰 목소리로 분명히 구할 수 있다면 이미 그 기도는 응답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많이 사랑하니 그것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과 그 사랑과 희생과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필요하니 그것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은 실제로 우리의 삶에 섬김과 희생과 사랑이 저변에 깔려 있을 때 더욱 빨리, 너무도 분명하게 응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고 살리려니 지혜가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하고 물질과 건강이 필요하고 명예와 권세가 필요하다”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해는 우리 모두가 이런 [완성도 있는 기도]가 더 많이 넘치기를 사모해 봅시다.
밖에서 성자, 집에선 악마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내가 다르기 까지 합니다.
물론 우린 범사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한다지만 이런 이원론적인 신앙은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연관이 없고 너무나 오래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기에 교회 안에서는 좋은 성도로 보이지만 심지어 사회에서는 지탄을 받고 무기력하며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 삶의 전부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모든 직업은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성직(거룩한 직업)이고, 우리가 있는 늘 생활하는 삶의 영역은 모두 성소(거룩한 장소)이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거룩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로 그(그녀) 이고, 그(그녀)가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 걸음 더...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성품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