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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모든 인류의 소망입니다

죽음은 현실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전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셨던 그 예수님은 또한 담대히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좀 더 일찍 오지 못해 그가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던 여동생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너희 죽음의 문제를 대신하고, 그리고 그 죽음의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인 [부활]을 가르쳐 주기위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입니다. 

[죽음] 앞에 우린 결코 담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죽음이 오게 된 이유가 인간의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과 너무도 자연스럽게 멀어진 삶을 살게 했습니다. 

지금도 모든 인류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하나님 없이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은,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이라는 문제에 묶여 그 이후의 시간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우리들에게 매우 정확한 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소중한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결국 부활을 보여주고, 그 부활을 소망할 것을 알려주기 위한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이 부활의 메시지가 우리 모든 온세대 가족들 위에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은 모든 인류의 소망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어두운 모습은 있다

문제를 만나면 피하기에 급급했던 아브라함, 
그의 부인 사라는 지나친 자기확신이 강했던 여자였습니다. 

특별히 남편 아브라함의 경우 이집트에 내려가서도 문제 피하려고 자기 아내까지 내어주고, 가나안으로 돌아와 아내 사라와 몸종 하갈과의 갈등도 중재할 만한 어떤 능력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중재하고 돌파해 내고 해결하려는 의지보다는 그저 피하려는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우리가 늘 그렇게 닮고 싶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사라 또한 하갈과의 갈등을 결코 인격적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주인마님의 그 너그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이름도 무서운 [학대:abuse]로 연결됩니다. 

[잘못된 자기신념]으로 시작된 불순종으로 엉뚱한 대상을 향해 학대했던 사람이 열국의 어미라고 하는 사라였습니다. 
우린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결코 완벽하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사용하실 때... 우리의 그 어떤 완벽함에 감동되어(?) 우리와 함께 일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고 착각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우린 하나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우리의 허물과 무너짐, 그리고 연약함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게 될 때가 더 많습니다. 

또한 우린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만들어 가시는 것을 삶으로 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끝까지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매일 겸손히 최선을 다해 함께 그 과정에서 더 견디고 이기고 기다릴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어두운 모습은 있다

부르심은 기적의 시작입니다

우린 성경 속에서 그 완벽한 하나님과는 반대로 전혀 완벽하지 못하고, 심지어 허물투성이인 사람들을 목격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마치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지목하셨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토록 불완전한 그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요 우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잊어선 안됩니다. 
물론 좀 더 괜찮은 사람만 불러 멋지게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완벽한 모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복음이 이해되고 납득되고 심지어 그 복음을 위해 내 삶 전체를 헌신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 상황은?
분명 우리의 의지만으론 불가능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적대적인 감정이 없다면 그게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 전부터 각각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시켜 주셨습니다. 학벌, 나이, 성별, 가정환경... 그 어떤 것도 그러한 부르심에 방해요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역사의 중심에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시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 한 사람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고,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면?
분명 그 부르심과 인도하심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기적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실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르심은 기적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믿음

요즘 우리가 큐티를 통해 만나고 있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조금도 갈등 없이 너무 쉽게 자신의 생각대로 결정을 해버리고 하나님과의 약속도 잊어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개 이렇게 얘기합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생활은 생활이지요. 현실은 어쩔 수 없다구요”
“그거 뭐 성경대로 사는게 쉬운 줄 압니까?”

물론 우린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현실이라는 장벽은 늘 우리에게 갈등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만약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그때부터 성경은 더 이상 사실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그저 서로 만나 정신적인 위로를 나누는 [소설책]에 불과한 허구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성경은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그 어떤 증명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와 논리적 사실을 통해 증명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린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볼때마다 더욱 분명한 거짓 없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믿음 없는 행동으로 필요 없는 위기와 근심을 만들어 낼 때가 많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그 위기를 스스로 자초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리를 붙드시고, 당신의 약속을 이루셔야 하는 책임은 괜한 우리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계획이 만났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혼란을 겪습니다. 
믿음 없는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결정들이 때론 얼마든지 우리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잊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온세대 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따르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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